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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피어난 선택의 비극

by jorae1218 2025. 4. 25.

2023년 개봉한 영화 〈화란〉은 김창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희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열일곱 소년 연규가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을 만나며 점차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연규 역은 신인 배우 홍사빈이 맡았으며 치건 역은 배우 송중기가 연기하였습니다. 영화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며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폭력과 가난으로 얼룩진 삶을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선택과 그 선택이 불러온 비극을 섬세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냉혹한 현실 속 인간 본성과 선택의 윤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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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세계에서 발버둥 치는 열일곱 소년의 초상

영화 〈화란〉의 주인공 김연규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살아가는 소년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정폭력과 가난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늘 도망치듯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엄마는 있지만 가족이라 부르기 어려운 이복동생과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꿈도 미래도 없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연규는 자신의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있고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연규의 감정을 과장되지 않은 묘사로 담담하게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소년의 고통에 공감하게 만듭니다. 연규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고 가정이라는 이름 아래 따뜻한 보호를 받고 싶었지만 그러한 바람은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짓밟혀 왔습니다. 그런 연규에게 유일한 희망은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로 떠나는 것입니다. 낯선 나라일지라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연규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을 모읍니다. 하지만 세상은 연규에게 그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동생 하얀을 괴롭히는 이웃 청소년들과의 다툼은 연규에게 예상치 못한 폭행 사건을 안기고 그 결과는 연규가 감당하기 어려운 합의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연규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고 경찰은 사건을 무마하는 데 급급할 뿐 정의도 연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무게는 연규를 더욱 어둠 속으로 몰아넣으며 그 순간 나타난 인물이 바로 치건입니다. 연규는 치건에게서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해 주는 어른의 모습을 봅니다. 치건은 연규에게 새로운 길을 제안하고 그 길의 끝이 지옥일지라도 연규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배경을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풀어내며 연규라는 인물이 단지 비극적 소년으로 소비되지 않도록 서사를 조율합니다. 연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세상에서 단 한 줄기 희망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결국 그것이 또 다른 지옥의 입구였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2. 구원의 손인가 파멸의 손인가, 치건이라는 인물의 이중성

영화 〈화란〉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치건입니다. 그는 조직의 중간 보스로 살아가고 있으며 법이나 도덕보다는 생존과 권력이라는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단순한 악인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치건은 연규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고 연규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그에게 형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이는 연규에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세상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연규에게 치건은 처음으로 '인정'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존재입니다. 치건 역시 연규를 통해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의 반복을 연규에게서 막고 싶다는 복잡한 감정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치건은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서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고 그 속에 연규를 끌어들이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치건은 연규에게 불법 사채 수금이나 무기 운반 같은 일을 맡기며 점차 그를 조직의 일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연규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치건이라는 인물의 인간성과 그 한계를 냉철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연규를 보호하려고도 하지만 동시에 연규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보호자인 듯하지만 동시에 파괴자로 기능하는 이중적인 면모는 관객으로 하여금 치건이라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송중기는 이러한 치건의 복잡한 감정을 절제된 감정 연기로 표현하며 기존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입니다. 그는 말보다는 눈빛과 행동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전달하며 치건이라는 인물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연규와 치건은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 방법이 서로를 구속하게 되면서 결국 파국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처럼 구원자와 파멸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한 인물의 양면성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진심이 얼마나 쉽게 뒤섞일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탐색합니다.

3. 선택의 무게와 지옥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영화의 후반부는 연규가 조직 내에서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연규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치건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결국 조직 전체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연규는 조직의 돈을 잃게 되며 생존을 위한 도망자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치건과의 신뢰는 무너지고 갈등은 점점 고조되며 결국 치건의 분노와 연규의 공포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연규는 치건을 죽이게 되고 그것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모든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치건의 죽음 이후 연규는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완전한 고립 상태가 됩니다. 영화는 이러한 전개를 통해 연규의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며 동시에 세상이 강요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연규를 범죄자로 단정 짓지 않으며 오히려 그가 선택한 이유에 대해 관객 스스로가 해석하도록 여지를 남깁니다. 김하얀이라는 인물 또한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연규가 유일하게 지키고자 했던 존재이며 동시에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연규는 치건과의 갈등 속에서도 하얀만큼은 안전하게 두려 했고 그 마음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연규는 치건을 죽인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얀과 함께 다시 떠나려 하지만 그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마치 현실에서는 누구도 완전한 구원이나 탈출을 얻지 못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드러내듯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관객은 연규가 선택한 길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판단하지 못한 채 묵직한 여운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화란〉이라는 영화가 지닌 힘입니다. 단순한 범죄 드라마나 느와르 장르의 전개가 아니라 인물의 심리와 선택 그 모든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케 하는 이야기의 완성도 때문입니다.

결론

〈화란〉은 한 편의 느와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는 정통 드라마에 가까운 서사를 지닌 작품입니다. 연규와 치건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외면받은 이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고 상처받으며 결국 서로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목격하게 됩니다. 영화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그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연결’이라는 이름의 감정마저 부서지는 과정을 통해 깊은 회한을 전합니다. 김창훈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연출 감각과 캐릭터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며 배우들의 몰입도 높은 연기는 이러한 감정들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화란〉은 우리가 외면해 온 사회의 단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며 동시에 그 속에서도 끝까지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희망일지 파멸일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진한 울림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